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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曺晩植, 1883-1950) 장로, 교육자, 독립운동가(3·1운동, 조선물산장려회) ①
김호욱(광신대학교 교수(역사신학), 기독교향토역사연구소 소장)
편집부   |   2020-09-10

병약한 출생과 교육 

고당(古堂)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안골이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조경학 선생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경건 여사의 1남 2녀 중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당(古堂)이며 창녕 조씨 가문으로 강서에서도 꽤 부유하고 명망 있는 향반이었다. 그의 가정은 부유하여 매년 벼 백 섬을 거두어 들였으며, 그의 부친은 평양에서 물상객주로 일하는 상인이었다.

 

어린 소년 조만식은 여섯 살 때부터 열네 살 때까지 서당에 다니면서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병약했는데,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사내자식이 얻어맞고 울려거든 밥도 먹지 말아라” 하고 벌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그는 호신술의 일종인 ‘날파람’을 배워 무예를 익혀 강인하고 날쌘 몸동작을 익히고 몸과 마음을 연마하여 체력을 키워나갔다.

 

조만식의 부모님은 지와 덕을 갖춘 분으로 어머니는 인자한 성품으로 자식의 교육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조만식이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으면서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성품을 갖고 지조 있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였다. 사람이란 의리와 절의(節義)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고당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 일제의 수많은 협박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업과 신앙생활 

조만식은 열네 살이 되자 평양의 종로거리에 백목전을 차린 포목상점을 열었다. 평양시장은 강경시장, 대구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때 그는 제법 많은 돈을 벌었고, 술도 잘 먹고 돈도 잘 쓰는 사람이 되었다.

 

1904년이 되자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어 대동강 중류에 있는 베기섬의 벽도지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고당은 피난처에서 친구 한정교의 이도로 교회에 출석했고, 평양으로 돌아와서 친구를 따라 장대현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장대현교회는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처음 개척하여 널다리골교회라고도 불리다가 예배당을 완공하고 장대현교회로 개칭하였다. 장대현교회를 다니던 그는 8년 동안 했던 장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늦깎이 공부 

조만식은 부모를 설득하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숭실중학교에 1905년 22살의 늦은 나이에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는 1897년 10월 1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裵緯良)가 평양 신양리 자신의 집에 학생들을 모아 그리치기 시작한 것이 모태가 되었고, 1901년에 선교사 스왈렌(William Swallen, 소안론 蘇安論)의 기금으로 학교 건물이 지어진 기독교 학교이다.

 

숭실학교에 입학한 조만식도 술, 담배를 끊지 못하여 망을 보게 하고 담배를 피기도 하였으나 말씀을 알아가면서 그해에 완전히 술, 담배를 끊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 고당은 배위량 선교사와 한문교사로 재직하였던 박자중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고 그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애썼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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