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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5-1949) 독립운동가(임시정부 수반), 정치가(남북 협상 주도) ②
이선이(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신학(Th.D), 필리핀 아태장신대(APCCS)교수)
편집부   |   2020-07-10

19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사건의 관련자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신민회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통감부는 1911년 소위 안명근 사건의 관련자로 그를 체포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었다. 이 감옥에서 그는 이름을 김구(金龜)로 개명하고 임시정부시절에 다시 구(九)로 바꾸었다. 그는 복역 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 되었다.

 

김구는 1918년 신한청년당에 입당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가 창설되었고, 그는 15명 동지와 함께 망명하여 임시정부 청사로 찾아갔다. 이때 김구는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나는 실력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청소를 할적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나라 정부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으니 임시정부의 정문 파수를 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약 25년 동안 임시정부에서 봉직했다.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가 갈등하여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해산을 명했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으로 인해 국무령제로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1928년 사회주의 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 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임시정부 수반으로 독립운동을 이끌다 

1931년 임시정부 산하의 한일 특공대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가 한인 애국단의 대표적인 사건인데 특히 윤봉길 의사의 성공으로 임시정부는 장개석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3년 난징에서 장개석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연합체 결성을 도모하여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임시정부를 장쑤성의 전장, 후난성의 창사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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